당신이 나의 붉음을 불능의 세계를
불구의 몸부림으로 불러주길 바라요
자, 엄마라고 해봐


폭풍 치는 밤 나는 쌀롱이나 밀실에서 태어났겠지
덜컹거리는 창문은 지금도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고
기억나는 건 붉은 커튼과 카펫

떠나자 같이 떠나자 해놓고 네가 자꾸 훌쩍이니까
이곳이 빗속인지 태양 속인지 헷갈려

여기 남을게 아름다운 백합으로 넘쳐나는 꽃밭
점차 남겨질 곳이 아니라 지탱할 곳이 필요해
내팽개쳤던 영혼들 무엇으로 피어날까

내가 알고 있는 괴로움이 귀와 콧속과 허파에 미치광이로 깃드는 밤

창문을 열어 푸른 새벽빛
그 위에 걸쳐 있는 차가운 발목
누군가 기를 쓰고 올라오려는 표식

다리 가는 뿔사슴아 사슴의 부드러운 가죽에 死자를 새기며
나의 한때처럼 영리하고 날쌨으며 얼룩도 이만큼이나 모았구나
지우지도 이루어지지도 못할

사냥해줘요

그토록 죽으려 했으니 이제 죽거라

걔랑은 헤어지는 게 좋겠어 네 신분과 어울리지 않아 물론 걜 위해서.

누가 누굴 위해 산다는 말인가 그만 기가 죽어 잠자코 말았다
시끄러울 게 뻔한데 의사는 신을 믿으라 하네 종교를 가져볼까 파티에 모두 초대해 그중 배워 교활해진 놈들과 술래잡기를 하면서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 것이 뭘까 생각해 그런데 술래잡기란 손을 잡고 하는 놀이였던가 눈을 가리면 축축한 손이 내 병을 낫게라도 한단 말인가!

사냥은 그만하고 돌아와요

그토록 죽으려 했으니 그만 죽거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대던 무녀의 비보를 전해들었다 그녀는 사후세계에서도 내 얘기를 엉터리로 지어내고 있으리라 그녀 몸짓은 점술가라기보다 집시에 가까웠고 종종 그녀의 뜨거운 다리 사이로 내 것을 거칠게 밀어넣었다 흑발로 자라나는 저녁

우리는 우리가 지나왔던 수많은 정원에 아무렇게나 꽃혀 있고
지나쳤던 입술들에게 나는 무엇으로 불리고 있을까

사냥을 가도 좋아요 하지만 나를 데려가줘
똑똑히 봐요 화살이 관통한 자리 검은 피를 토해가며
당신을 향해 무너져가는 나의 완고한 시선……

이곳은 한낮의 소나기도 비껴가는 망가진 꽃밭
창문을 열어 푸른 새벽빛
그 위에 걸쳐 있는 차가운 발목
누군가 기를 쓰고 오르려다 떨어지겠지

몇해째 내가 피해 다녔던 괴로움이 귀와 콧속과 허파에 미치광이로 깃드는 밤


주하림, 〈빠리의 모든 침대가 나의 고향〉,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비, 2013, p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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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법을 모르는 소년을 찾고 있어 사랑하려고
사탕을 빨아먹는 아이와 사탕을 깨물어 먹는 아이에 대해 나는 다 알고 있거든

소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줄무늬 티셔츠를 좋아하던 아동이었다지 물감만을 바르지는 않겠어요
물의 속성으로 그대로 두세요 고운 색깔로 규정하기를 반복하는 소녀들 속에서 빠져나와 소녀는 과거를 노래한다 아빠가 죽고 엄마가 죽고 나는 죽지 않고 잘도 자라네 행복의 뒤 페이지는 죽음 상냥한 친구들도 거절할래 선물도 받지 않을래 기쁠 것도 없으니까 슬플 것도 없을 테지

가리고 있는 바람의 파티션 너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약한 소녀를 꺼내라
소녀를 등장시키면 소년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는 법
이미 절반의 소년 옆에서 느끼는 girl을 돌보는 boy를 만드는 것은 girl의 진리
숟가락 하나를 놓는 것은 끼니를 때우는 일 같지만 숟가락 두 개일 때는 화목한 식사로 보이기도 하니까 혼자가 싫은 소녀는 서둘러 소년을 만들어내려 한다 자칫 오차가 생겨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인색한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소녀가 살고 있는 집의 적나라한 키친 앞에서는 어쩐지 벌거벗고 함께 먹는 소년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세련된 터치 방식은 없는 거니? 어떤 날은 내가 너무 싫고 어떤 날은 내가 너무 좋아 소년은 어떨까 기분이 좋아져야 예쁜 목소리가 나오지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 쉽게 손 흔드는 것들을 영원히 떠나려고 해

창문을 닫고 잠들어야 하는 cold wind의 계절이 오면 '보살펴주다'와 '따뜻하다'를 훔쳐 적어 소년과 함께 겨울잠에 들기 전에 소녀는 떠나온 소년들에게 엽서를 띄우겠다고 한다 깊게 잠들기 전에 소녀는 완성한 소년과 동물원에도 다녀오기로 약속한다 소년이 동물 그 자체 그런 형태 그런 무늬 그런 상태를 꿈꾸기 전에 아담의 이브처럼 따 먹기 전의 태초의 마음처럼 조심스레 입으로 딸기를 옮기듯 소년 소녀 풀어 헤친 앞가슴과 배꼽을 보이고 마주 서 있어도 괜찮은 것처럼

이빨 상한다 살살 빨아서 천천히 녹여 먹으렴

사탕을 빨아먹는 소년과 사탕을 깨물어 먹는 소년이 자라
사랑을 빨아 먹는 남자와 사랑을 깨물어 먹는 남자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벌레가 먼저 먹은 잎사귀인 듯 끼어드는 것들이 먼저 남긴 흔적이 더 먼저 보인다

사랑을 천천히 빨아 먹는 소년을 만들고 있어 오래 사랑하려고
나의 처음을 줄게 처음이 첫번째는 아니야 너는 '무엇'을 줄 거니 '언제'를 줄 거니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 사실 나는 갖고 싶지 않거든 소녀는 원하는 소년을 만들고 서둘러 만드는 방법을 삭제한다 소녀는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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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부분들 사진 찍었다 개인적으로 시보다 뒤에 부록같은 에세이가 더 맘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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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가깝고 손목을 구부린다 손목을 구부리면 복도가 생기지 복도에서
복도로 이어지는 손목들 불을 켜면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불이 들어온다 모퉁이를 돌면 멀리서 어두운 손목 나는 영원히 복도의 끝에 다다를 수 없다
손의 뒤에 손목을 숨길 줄 아는 당신을 사랑해요
알아요 교묘하므로 나는 아름다워요
네가 없는 방으로 네 아내가 나를 이끈다 눈동자보다 먼저 오는 슬픔과 젖은 손 흩어지는 빛과 머리카락 사상은 침대 위에서 기꺼이 사살되고
붉은 유산들이 장미보다 붉게 유산되는 밤
피가 흐르기 전에 빛은 몸 안에서 핏줄이었다 처음부터 열고 나온 상처를 딛고 두 손으로 몸의 다른 곳을 찢어 내가 네 아내를 받아들일 때
네 아내의 몸이 필라멘트처럼 빛난다 발목을 구부리면 저 쪽이 환한 복도
불을 하나 켜면 손목이 사라진다 또 불을 하나 켜면 발목이 사라지지 필라멘트처럼 빛나는 틈이 툭 툭 벌어지는 복도에서
복도의 한 곳을 찢어 복도로 벌어지는 찢은 복도에서
이제 불을 모두 켜면 무엇이 사라질까
알아요 손은 영원히 손목에 다다를 수 없어요

어차피 불가능한 다방이에요
불가피하게 날이 저물죠
치통처럼 11월은 오고,
목요일은 지나가요
걸레질이 끝나면 화장을 고치죠
난간에서 선량한 음모를 쓰다듬으며
등이 굽고 엎질러진 숙맥들이나 사랑하면서
모든 연민은 구석에서 식어 가요
마음속에서 마음을 찾는 것만큼 외로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누구나 혼자 걸어가는 망령인 걸요
우리는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으니까
돌아앉은 골목과 납작해진 각오들,
아무튼이라고 말하는 입술들,
어떤 손가락은 서둘러 담배를 끄고
7시의 여자들을 만나러 가죠
참 이상하죠? 고장난 것들을 사랑한다는 건
물끄러미 연속극이나 보면서
바닥에 대한 믿음 하나로 그냥 살아요
다방은 그저 다방일 뿐이죠
여기서 사소하고 유일한 티켓을 기다리거나
끝끝내 슬픈 슬리퍼에 대해서 함구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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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wtswt

함성호, 발화

2019. 1. 31. 21:04

목재는 100'C 이상 가열되면; 추워라, 추워라,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아무리 그대 얼굴 떠올려도 생각나지 않네; 가연성 가스인 CO, H2, CH4 등이 발산되고; 나는 심해의 향유고래처럼 미지의 어둠에서 떨고 있구나; 150'C 이상 되면 탄화 작용으로 흑갈색으로 착색되며; 얼마나 사랑했으면, 얼마나 사랑했으면; 250'C 이상 되면 화원(火源)에서 스스로 불꽃을 당겨 인화하며; 피의 온도- 칼날처럼 슬픈 너의 꽂이[齒]를 기억하고 있지; 화원이 없이도 목재 자체에서 불길이 일기 시작한다; 너는 왜 나를 파고들지? 기억하니? 미친 내 인생을

이상해요
달콤한 당신을 보면
나는 당신의 두 손을 만져보고 싶어져요

혼자 뒤뜰에서 벙그러지는
아름다운 꽃들터럼
속임수는 견딜 수 없게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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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또 쓰레기를 뒤졌어요. 쓰레기봉지가 여기저기 터져 있어요. 막아도 봉해도 소용없어요. 이젠 집에까지 들어오고 있어요. 빵이나 과자, 장바구니에 담긴 생선들이 자꾸 없어져요. 나도 자꾸 사라지고 있어요. 고양이가 나를 훔쳤어요.

가장 미끄러운 것은 왼쪽 귀
만지면 이상해 이상해져

춥다고 했어. 결정된 부력이라서 그냥 떠올랐어. 멈춰지지 않는. 이것이 당신이 원한 물과 참의 숭고인가.

나는 자꾸 눈을 생각하고
호르몬처럼

수식 없이 주어를 주고받는
날개들 예감 없이 이뤄지는

염력을 쓸 때 주의할 몇 가지 감정. 당신은 반드시 돌아봐야 하고 돌아본 채 돌아봄의 견고를 견뎌야지. 그런 작명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차갑고 긴 것

이봐. 정말 추운 것은 그런 게 아냐. 물의 씨앗들이 핏속을 떠다닐 때. 발아에 복종할 때. 몇 개의 구멍들, 고개를 내밀고 초록이 뒤틀릴 때

처음이라고 말하는 사람
미끌미끌한 포도 냄새

불속을 지나가는 새의 무리
물 위를 떠가는 뒤집힌 얼굴

녹슨 사슬을 끌고 멀어지는 시선. 숲에 잠겨. 통제할 수 있는 불의만 남으면 더 간단할 높이에서.

색과 색의 밖에서
발끝을 세우고 듣는다.

추락하지. 가속도를 이해한다는 건 어렵지 않지.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앙상한 나무들이라고 해둘까. 쉽게 말하고 쉽게 잊는 것이 좋지. 물론

외침. 속삭임
이 장면에는 흑백이 필요하다.

제발 두려워하지 말고 두 팔로 나를 안아.

이것이 재난이라해도, 나는 너를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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